둘 다 맞는 말을 하는데 대화가 막힌다
아래는 예전에 내가 업무로 대화할 때 느낀 마찰을 각색한 상황이다. 월말 정산 자료를 취합하던 중 A가 정산 파일을 올렸는데 다른 작업자 B가 묻는다.
B: 이 파일, 이번 달 최신 양식으로 만든 거 맞나요?
A: 예. 지난번에도 이걸로 드렸는데요. 확인해 보시죠. 이상 없습니다.
B: 202607 폴더의 파일로 만든 거 맞나요? 작업 폴더에서 만든 걸로 보여서요.
A: 폴더는 달라도 202607 파일 맞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
B: 보고서가 잘못 올라가면 위험해서 그래요. 꼭 최신 파일로 작업하고 202607 양식에 맞춰야 합니다.
A: 최신 파일에 202607 양식으로 맞췄습니다. 폴더만 원래 작업하던 방식입니다.
B: 나중에 숫자 틀어지면 그때 가서 누가 책임지나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작업해야 합니다.
이 대화는 이후로도 한참 이어진다. B는 계속 위험을 이야기하고 A는 계속 문제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상황을 보면 둘 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A의 파일은 실제로 최신 양식이 맞았고 B는 보고서가 잘못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화는 매끄럽지 않다. 들여다보면 서로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며 시간을 소모한다. 왜일까.
A는 사실을 말했지만 B의 우려를 받아주지 않았다. "정상입니다"와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는 정보로는 맞는 말이지만 오류를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은 쓸 데 없는 걸 걱정한다"로 들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B는 물러서지 못하고 계속 파고든다. 우려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허공에 뜬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가 소모전을 끝냈다
이 대화는 결국 제3자인 팀장 C의 한마디로 끝난다.
C: 이번 건은 올라온 파일 그대로 진행 부탁드리고요. 다음부터는 B님이 말씀한 절차로 확인하고 진행하시죠.
이 말에는 판정이 없다. 누가 맞았는지 따지지 않는다. 대신 양쪽의 의도가 다 들어 있다. A의 의도(이번 정산을 예정대로 마감하는 것)와 B의 의도(앞으로 사고가 나지 않을 절차를 만드는 것)를 다 받아들여 마무리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상당 시간 공방을 벌여도 결론이 안 난 일을 말 한마디로 해낸 셈이다.
AI에게서 배우다
사실 위 대화에서 A는 나였다. 대화를 끝내고도 꽤 찜찜했다. 내 말이 다 맞았는데 왜 사람 진 빠지게 흘러갔나 싶었다.
당시 개발은 물론이고 다양한 일을 AI에게 맡기기 시작한 시점인데 AI가 일적인 대화를 곧잘 한다고 느끼던 참이라 이 상황을 그대로 AI에게 상담해봤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건지, B와 어떻게 대화해야 했는지. AI는 상황을 듣더니 아래와 같은 요지로 대화 방향을 정리해줬다.
- 감정 정리 — “답답할 만합니다. 파일도 실제로 최신 양식이 맞고요.”
- 목표 일치 — “그런데 지금 목표는 '내가 맞다’는 증명이 아니라 '상대가 안심하고 넘어가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 대응 제시 — “그러니 대응도 '왜 의심하느냐’가 아니라 '이 부분은 이렇게 확인하시면 됩니다’로 가는 게 맞습니다.”
사람도 아닌데 AI가 상담을 잘한다. 대화가 매끄럽지 않은 이유, C의 상황 정리가 통한 이유도 알겠고 AI의 대화 방식 자체가 내 상황에 대한 해법이라는 것도 보였다.
설명 또는 방어부터 시작하면 상대 역시 방어적이 된다. 반면에 인정을 먼저 하면 상대는 들을 준비가 된다. 목표를 맞추고 나면 설명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의견 공유의 재료가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상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만 반복했으니 B 입장에선 계속 위험과 절차에 문제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AI와 이 대화를 복기하면서 다른 일에서도 이 방식을 의식적으로 써보기로 했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말을 인정하는 것
다만 조심할 게 하나 있다. 기계적으로 위 방식을 따르면 "좋은 지적이십니다만…"으로 시작하는 영혼 없는 화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인정이 필요하다. 상대의 우려가 어떤 지점에서 정당한지 짚고 필요하다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위 상황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일이 꼬였을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신 부분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번 파일은 최신 양식이 맞고 변경 이력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혼선이 없도록 파일명에 양식 버전을 표시하는 건 어떨지요?
단순한 맞장구가 아니라 상대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서 대답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는 안심할 수 있고 안심한 사람과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물론 실제 대화는 위와 같이 3단계로만 되지 않는다. 이론은 알아도 실전은 계속 갈고 닦아야한다.
위 계기로 내 대화 방식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MBTI의 T 스타일이라 그런가. 전에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으면 반사적으로 사실부터 꺼냈다(사실이란 것도 나의 관점일 수 있고). 맞다, 틀리다보다 중요한 건 대화가 통하는 것이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 기계에게 사람 대하는 법도 배우다니 묘한 일이지만 덕분에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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